여름날 햇빛속에 옛동네를 걸어가다
건널목앞에 있는 그녀를 보았지
조금은 변한듯한 모습 아쉽긴 했어도
햇살에 찌푸린 얼굴은 아름다웠지
너의 손을 잡고 말을 하고 싶어도
소중한 기억 깨어질까봐 그냥 다시 돌아서
잊어버렸던 첫사랑의 설레임과 떨려오는 기쁨에
다시 눈을 감으면 너는 다시 내곁에
예쁜 추억으로 날아들어 내어깨위에 잠드네
무한궤도, 1989 (작사, 신해철)
노래는 신해철이 부르고 있지만, 곡 전체적인 스타일은 신해철 답지 않은 노래이기도 하다.
마치 남의 노래를 신해철 스럽게 부른 노래라 할까.
무슨 말이냐 하면, 신해철이 작곡한 곡은 분명히 그의 색채가 있는데 <여름이야기>는 독창적인 신해철스런 멜로디라인이 아니라는 거다.
단순한 코드와 반복되는 멜로디로 주선율을 이어가는 이 곡은 무한궤도의 멤버 김재홍이 작곡한 곡이다.
팀에서 키보드(신디)를 맡고 있는 김재홍이었기에 이 노래의 멜로디라인은 역시 키보드가 이끌어간다.
(이런걸 신스팝이라고 강헌은 말한다, 대체적으로 무한궤도의 앨범은 키보드 사운드 중심이다. 5인조 밴드에 키보디스트만 2명. 나중에 정석원까지 합류했으니 키보드 연주자만 3명인셈이다. 락밴드라면 기타리스트가 2명에 베이시스트 1명이 기본 일텐데 말이다. 사실 무명시절의 무한궤도는 신디가 주를 이루는 서구밴드를 많이 카피한 걸로 알고 있다.)
이 노래에서는 기타가 많이 쳐져있고, 대신에 빠른 템포의 드럼 비트가 노래의 흥을 받쳐준다.
라이브 영상을 보면 기타는 거의 장식품에 가깝다.
첫사랑의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이 내 가까운 곳에 일어난다.
가사에서도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마주치던 소녀가 첫사랑의 대상이다.
나는 그 동네를 떠났지만, 첫사랑은 아직까지도 그 동네에서 살았던 모양이다.
동네의 골목과 가게들 모두가 그녀와 연관되어 어떤 은유적인 대상이었고, 그 추억들도 여전히 가슴을 설레이게 할만큼 아직까지 생동하는 듯 하다.
그런데 골목에서 그 소녀를 마주치다니. 몇 년만에 말이다.
변한듯 변하지 않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갑자기 커져버린 심장 박동소리에 나는 놀란다.
그녀에게 다가가 '나 기억하냐고, 나 알아보겠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릴 적 첫사랑에 대한 좋은 기억이 깨어질까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주저한다.
누구나 갖을만한 망설임이다.
첫사랑에 관한 잠언들이 참 많다.
첫사랑은 가슴에 묻어두는 것이라고.
가사에서는 '소중한 기억 깨어질까봐 그냥 다시 돌아선다', 고 말한다.
아릿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너는 다시 내 곁에 예쁜 추억으로 날아든다', 라고 말한다.
순수함이 묻어난 사춘기 소년의 감성이 느껴진다.
물론 사춘기를 벗어나 어엿한 성인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릴 적 순수함을 지키고, 훗날 예쁜 기억으로 남아두겠다는 마음은
답답하고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마음 자체는 아름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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