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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림, 음악 에세이/그림이 있는 에세이

비내리는 날에는

by soodiem 2024. 2. 14.

  비가 내리는 날이다.

꼭 이런 날에는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그는 녹색 대문 앞에 서성거리고 있다.

녹색 대문집은 그가 알고 있는 집이다.

그 집에 살고 있는 그 누군가를 그는 알고 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그 녹색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본 적은 없다. 

그가 알고 있는 그 누군가가 그 녹색대문으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누군가가 그 녹색대문집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누군가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잘 알고 있다는 말은 그가 그 사람의 얼굴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사람의 이목구비를, 뚜렷하게 생긴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의 얼굴에서 조화를 이루는 그것들을 인상이 남도록 그의 기억의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동그랗게 큰 얼굴에 자리잡은 눈, 코, 입들을 잘 기억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그것들이 보인다. 

그것들은 감은 눈에서조차도 잘 보인다. 

옆으로 살짝 찢어진 눈, 아랫입술이 까진 입, 두터운 콧살이 붙은 코.

하나 하나 뜯어보면 예쁘지 않지만, 커다랗게 동그란 얼굴에 그것들은 알맞게 조화롭다. 

그는 살짝 옆으로 찢어진 눈을, 아랫입술이 살짝 까진 입을, 두터운 콧살이 살짝 붙은 코를 가진, 그리고 녹색대문집에 살고 있는 그녀를 잘 알고 있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녹색대문집 앞에 서성거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거의 동시에 동그런 얼굴과 그 얼굴에 박혀있거나 달려있거나 붙어있는 이목구비를 기억하며, 안개처럼 자욱하게 살짝 살짝 살짝 내리는 빗속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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